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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한 일상

카인과아벨19회 - 이선우의 눈물


작가 박계옥님은 어쩌면 이렇게 인간의 속성을 꿰뚫고 있는지요.

그렇습니다.
인간은 언제나 악인(惡人)과 선인(善人)의 양면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지금 한없이 불쌍해 보이는 선우(신현준분)는 어쩌면 그의 선인(善人)적인 면이 보여지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리고 지금 피도 눈물도 없이 찬바람이 쌩쌩 불 정도로 냉정하게 보이는 초인(소지섭분)의 모습은 우리의 악함을 대변하고 있는 듯 합니다. 우리 스스로 완전할 수 없는 우리 인간의 나약함 말입니다.
그런 초인을 두둔하고 있는 우리의 모습도 결코 선일 수는 없습니다.


이 드라마는 여느 드라마와 다른 전개 양상을 지금까지 보여주고 있습니다.
중간에 악역의 선우가 주인공 초인에게 연전연패를 당한 것도 다르고 지금 마지막회를 남겨 놓은 시점에 주인공 초인이 욕을 먹게 내버려 두는 것도 다릅니다.

여느 드라마는 지극 선(=주인공)과 지극 악(=악역)의 대결을 그리고 있습니다.
그래서 극의 3분의 2 가량은 주인공이 악역에 의해 철저히 유린당하고 린치를 당합니다. 그러다가 마지막 결말에 주인공이 모든 악을 응징하고 잘못된 것을 바로잡음으로써 관객들에게 최상의 카타르시스를 줍니다.

또 아니면 주인공이 마지막에 다시 한번 악역에게 철저하게 짓밟힘으로 불행한 결말을 맺고 나머지 선택권을 관객들에게 줍니다. 그러면 관객은 극장문을 나서면서 자기의 불행했던 과거를 주인공에게 투영시키고 관객은 마음속으로 악을 응징하고 모든 것을 제자리에 돌려 놓습니다.

어찌되었던 권선징악입니다.
차이는 극의 주인공이 결말을 맺느냐 아니면 관객인 내가 결말을 맺느냐의 차이입니다.

그러나 <카인과 아벨> 이 드라마는 우리속에 있는 악함을 곳곳에 드러냄으로 관객이 드라마에 순간 순간 개입할 수 있는 개연성을 열어 놓았습니다.


이것을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은 곧잘 불만을 터트리기도 합니다.
왜 작가는 악역인 선우에게 집착하는 것이냐는 것이지요. 그들은 여느 드라마처럼 선우가 철저하게 망가뜨려지는 것을 은연중에 기다리고 있습니다.
어제 분만 해도 선우는 시청자들의 동정심을 이끌어내기에 충분한 역할을 하였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우리 속에 있는 또다른 악의 발현입니다. 악을 응징한다고 악인에게 가하는 폭력도 또다른 악입니다. 인간이 인간을 상대로한 폭력은 어떠한 경우에도 정당성을 얻을 수 없습니다. 그것이 비록 나를 죽이고 나의 부모를 비참하게 죽게 한 원수일지라도 말입니다.

철저하게 유린 당한 초인만 우리의 모습이 아니라 선우의 악함도 우리의 모습이요 심지어 초인이 행하는 형에 대한 싸늘함도 우리의 모습입니다. 우리 주위를 둘러 보고 아니면 주위의 한 사람에게 허심탄회하게 자신의 장.단점을 말해달라하면 즉시 알 수 있는 사실입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을 모릅니다.
우리는 우리의 악함을 모릅니다.
그래서 우리는 항상 겸손하게 자세를 낮추고 내가 제 길을 바로 가고 있는가, 나로 인한 피해는 없는가 하는 일신우일신(日新又日新)  [각주:1]하는 자세가 있어야 할 것입니다.


  * 이 포스트는 blogkorea [블코채널 : TV 이야기 (드라마, 쇼프로, 방송)] 에 링크 되어있습니다.   
  1. 날로 새롭고 또, 날로 새로워짐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