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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한 일상

독립유공자 후손들 생활고에 시달려

독립유공자 후손들 생활고에 시달려

※ 이 글은 Daum의 블로그 뉴스 이벤트인 <나는 대한민국 사랑을 담은 블로거!>에 당선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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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나라
온국민의 관심이 베이징에서 열리는 올림픽에 쏠려 있던 지난 8월 15일 광복절 62주년 저녁에 CBS 라디오의 한 프로에서는 우리가 익히 잘 알고 있는 안중근 의사,도산 안창호 선생, 단재 신채호 선생들의 후손들이 극심한 생활고에 시달리고 있다는 충격적인 사실을 10여분에 걸쳐서 짧게 전했습니다.

내용인즉슨 "독립유공자 유족 6283명 가운데 직업이 없는 사람이 60%를 넘고, 봉급생활자는 10% 남짓이며, 중졸 이하 학력이 55% 이상이며 이들은 대부분 비참하게 산다"는 것입니다.



역대 어느 정부도 해결하지 않아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가 있습니까.
우리나라가 눈부신 경제 발전을 이루어 세계 10위권의 경제대국이 되었고 올해 세계 축제라 할 수 있는 올림픽에서 우리나라 선수들이 딴 금메달을 보며 대한민국인임을 자랑스러워하는데 한 쪽에선 극심한 생활고를 겪고 있으며 그 대상이 다름아닌 바로 오늘의 우리를 있게 한 독립유공자들의 후손이라니요. 순간 가슴이 답답하고 정신이 아득하여 내 귀를 의심하였으나 인터넷 검색을 해보니 이것이 2008년에 새롭게 알게 된 사실이 아니라 매년 광복절때마다 반짝하고 제기되지만 어느 누구하나 꾸준한 관심이 없으며 민주 투사 출신의 대통령을 2분이나 모셨고 인권변호사 출신의 대통령도 모셨지만 역대 어느 정부도 해결하지 못한 사실(안한 것이 아니길...)이라니 통탄할 수밖에 없는 사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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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중근 의사의 일가 중 독립운동을 한 사람이 40명을 넘는다고 합니다. 안 의사의 하얼빈 의거 뒤 일제의 탄압을 피해 러시아 연해주로 옮겨간 가족은 일제의 추격에 의해 안 의사의 맏아들이 여섯 살에 일제의 밀정에게 독살당하였고 광복후 부인 김아려 여사는 광복된 고국을 밟지 못하고 중국 상하이에서 숨을 거뒀으며 광복후 귀국한 안 의사의 사촌 동생 경근씨는 4·19혁명 후 민주 정치를 위해 나섰다가 5·16 군사정권에 의해 7년간 투옥됐다고 합니다. 안 의사의 조카 민생씨는 평화통일 운동에 매진하다 역시 5·16 군사정권에 의해 10년 동안 징역살이를 했고 안 의사의 조카 진생씨는 1980년 전두환 정권 때 강제 해직당한 뒤 충격을 받고 쓰려져 8년간 투병하다 숨졌다고 합니다. 이같은 푸대접과 설움 속에 안 의사 유족은 해외로 뿔뿔이 흩어졌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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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임시정부 지도자이자 흥사단을 창립한 민족계몽운동가 도산 안창호 선생.

그의 가족은 광복후 모두 미국으로 건너갔으며 안창호 선생의 자녀는 대부분 미국에서 성공적으로 자리 잡았지만 한국과의 왕래는 거의 없었다고 합니다.

그 이유는 굳이 말하지 않아도 우리 자신이 더 잘 알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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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에 항거하며 민족 운동을 하였던 단재 신채호 선생의 아들 수범씨는 일제 때 은행에서 일했답니다. 하지만 광복 후에는 직업을 잃었습니다.

왜냐하면 신채호 선생이 임시정부 초기 이승만의 정책에 반대했기 때문에 수범씨는 자유당 정권에서 신변을 위협받았기 때문입니다. 죽을 고비도 몇 번 넘겼다고 합니다. 수범씨는 넝마주이·부두 노동자 등 떠돌이로 살아야 했답니다.

신채호 선생
은 일제가 만든 호적에 이름을 올릴 수 없다고 신고를 거부하고 1912년 망명길에 올랐으나 신채호 선생의 대한민국 국적은 현재까지도 회복되지 않아 아직까지 무국적자 신분을 헤어나지 못하고 있다고 합니다. 그래서 단재 선생 명의의 땅과 집은 호적이 없다는 이유로 인정받지 못하는 실정입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대한민국 임시정부 사용 태극기> 사용자 삽입 이미지<대한민국 임시정부 청사 입구>

독립유공자 후손이 문전걸식

대한민국 임시정부 국무위원 비서장을 지낸 차리석 선생은 1945년 9월9일 환국을 준비하다 과로로 쓰러져 해방된 조국 땅을 밟지 못한 채 숨졌습니다. 광복 뒤 차리석 선생의 아들 영조씨는 친일파 후손이 떵떵거리는 사이 숨어 지냈다고 합니다. 영조씨의 인생은 고달픔과 배고픔으로 점철됐다고 합니다. 어머니 김씨는 좌판을 벌이고, 생활용품 행상에 나섰지만 입에 풀칠하기도 바빴다고 합니다.
결국 영조씨는 동냥을 해야만 했다고 합니다. 영조씨는 “아침마다 한 숟가락씩 문전걸식으로 살았다. 월사금은 한 번도 못 냈고, 도시락도 싸본 적이 없다. 우물물만 실컷 먹고 살았다”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초등학교를 졸업할 즈음 어머니 김씨가 중풍으로 쓰러지면서 영조씨는 학업을 포기해야 했으며 영조씨는 ‘아이스케키’ 장사, 여관 심부름, 국밥 배달 등 돈 되는 일은 안 해본 일이 없다고 합니다.

스리랑카 사람이 독립운동가 대 이어

상하이 임시정부 외무장관을 역임한 장병준 선생의 4형제는 모두 독립운동을 했습니다. 구한말 신안군 장산도 일대에 염전과 전답을 가지고 있던 천석꾼의 재산은 모두 독립운동 자금으로 들어가서 장병준 선생의 장남 경식씨는 제대로 교육을 받지 못해 그럴싸한 직업도 가져본 적이 없다고 합니다. 이 악순환의 고리는 손자 하정씨(65)에게 고스란히 이어졌으며 하정씨는 경기도 용인시 한 시골 마을에서 정부의 도움 없이 쓸쓸한 말년을 보내고 있습니다. 홀로 지내는 하정씨를 돌보는 사람은 한국인이 아닌 한국에 일하러 온 스리랑카인 오산다 씨(30).

2008년 8월 현재 국가보훈처에 등록된 독립유공자는 223명, 유족은 6283명입니다. 이 가운데 직업이 없는 사람이 무려 60%를 넘고, 고정 수입이 있는 봉급생활자는 10%를 조금 웃돈다고 합니다. 유족 가운데는 직업이 일정치 않아 수시로 바뀌고, 그나마 봉급생활자 중에도 특히 경비로 일하는 사람이 많았다고 합니다. <기사 출처 : 시사인 - “독립군 할아버지 저는 배를 곯아요” >

참 부끄러운 현실입니다.
그런데 우리 나라를 팔아먹은 매국노들의 후손은 어떻습니까?
그들은 독립 유공자 후손과는 대조적으로 엄청난 기득권을 누리며 떵떵거리고 살고 있습니다.
< 해당기사 바로가기 : 시사인 - “친일파 할아버지, 고맙 습니다” >

매국의 댓가로 받은 하사품인 재산을 돌려 받기 위해 소송을 벌이고 있으며 아직도 재판에 계류중인 것도 있습니다.

물론 선대의 잘못을 언제까지 그 후손에게 덮어 씌운다는 것은 화합을 이루어 국가의 발전을 이루어야하는 대국적 견지에선 케케묵은 사고방식으로 치부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에 견주어 독립유공자들의 후손이 대한민국 정부의 방치와 우리의 무관심으로 생활고에 시달려야 한다는 것은 우리 모두의 크나큰 수치이며 우리가 저지르고 있는 또다른 매국에 버금가는 일이 아닌가 필자는 생각해 봅니다.

“독립운동가 후손이라는 자부심은 사치다”

신채호 선생의 며느리 이덕남씨는 “나라를 되찾은 지 63년이 지났어도 아직까지 아버님이 한국인이라는 사실을 가지고 나라와 싸워야 한다. 독립을 위해 목숨 바쳤던 독립운동가의 후손이 이 땅에서 자부심을 갖는 것은 사치다”라는 말로 한없이 우리를 부끄럽게 합니다.